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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스크랩] 3581.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-81- 그거 알아요? 나는 위선자예요/ 최복현

~~^^*~~ 2017. 6. 14. 08:42

 

81. 그거 알아요? 나는 위선자예요/ 최복현
   
"선생님의 글은 참 아름답습니다. 부드럽고 깔끔합니다. 그런데 선생님은 선생님의 글처럼 실제로 생활도 그렇게 하시나요?"

작가와의 대화에서 어느 분이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. 글을 읽는 이들은 작가의 글과 작가의 삶을 동일시합니다. 글처럼, 내가 쓴 글처럼 그렇게 실제로 내가 살 수 있다면 좋겠지요. 그게 가능할까요? 물론 글처럼 그대로 사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. 실제 삶만 쓴다면 가능합니다. 그러나 글이란 게 현실만, 사는 이야기만 쓰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살기는 어렵습니다. 글처럼 살고 싶은 마음, 그게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일 겁니다.

 

때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. "그렇지 않습니다. 내가 쓰는 글처럼 살고 싶긴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. 한때는 글과 나의 삶이 달라서 괴로울 때가 있었어요. 너무 위선적인 것 같아서요.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.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 이런 식으로 분리합니다. 오히려  글처럼 살 수 없어서 글을 그렇게 씁니다. 글은 나의 바람이자 희망사항이라고난 할까요. 분명한 건 그런 아름다운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착한 마음을 갖습니다. 그게 삶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요.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위선자입니다." 이게 내 대답이었습니다.

 

글이 아름답다고 그 사람이 반드시 글처럼 사는 건 아닙니다. 글과 작가의 동일시는 때로 우리를 실망하게 하는 이유가 그때문입니다. 그건 마치 정치인의 말과 정치인의 삶을 동일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. 정의를 외치던 어느 정치가의 실제 삶을 보면, 그 정치가 역시 정의롭지 않은 일들이 남못지 않습니다. 때문에 자기 말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것이 정치인이요. 자신의 글에 자신이 넘어지는 게 작가입니다. 이를테면 "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'고나 할까요. 인간인 인간인 것은 짐승과 달리 위선적이라는 것, 가면을 쓰고 산다는 것,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.

 

열여덟 살 때 늑막염에 걸렸습니다. 병원에 갈만한 돈이 없었습니다. 기도로 고칠 수밖에 없어서 한얼산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. 지금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주 순수한 신앙을 가졌을 때였습니다. 기도를 하면 남들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고 싶었습니다. 나름 간절히 기도했으나 믿음이 없는 탓인지 방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. 나에게서 멀지 않은 자리에서 유창한 방언으로 기도하는 한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. 부러웠습니다. 그 부러움 때문에 그 분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. 기도 시간이, 예배시간이 끝났습니다. 신발은 신발장에 넣어두고 예배를 드리는 성전이었던 탓에 예배를 마치고는 신발을 찾아 신고 나가야 했습니다. 몸이 안 좋은 나는 늘 나중에 나가곤 했습니다. 저만치 내 앞에서 나가던 그 분, 아마 신발이 자기가 놓아둔 곳에 없었나 봅니다. "어떤 6C랄 년이 내 신발을 가져갔어." 그 분의 말에 산통이 깨졌습니다.

 

그때만 해도 수순하기만 했던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. 그런데 작가라는 가면을 쓰고 글이랍시고 쓰면서 그 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. 아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입니다. 인간처럼 위선적이고,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며, 더구나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나 행동과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을. 그게 인간이었습니다. 인간 전체가 그토록 위선적이고 추한 것은 아니지만, 감정을, 속내를, 마음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말고는 없습니다. 위선이란 단어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. 나 역시 그렇습니다. 글을 많이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아주 아주 위선자입니다.

 

부끄럽지요. 당연히 부끄럽습니다.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위선에 대해, 잘못에 대해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. 당연히 자신의 말, 자신의 글,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. 사람이니까 위선적이지만, 다른 짐승에 비해 추하지만, 아니 추태를 부릴 수 있지만, 사람이 다른 동물보다 나은 점은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질 수도 있다, 자신의 언행을 부끄러워한다, 위선에 솔직한 용서를 구한다는 점입니다. 변명이 나를 초라하게 합니다. 구실이 나를 추하게 합니다. 나는 아름다운 글을 씁니다. 나쁜 짓을 하자고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. 기왕이면 아름답게 살자고 글을 씁니다.  때문에 나는 나를 다스리려 내 언행과는 동떨어진 글을 씁니다. 위선의 글을 씁니다. 반성의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. 내 인생의 어느 때쯤 글과 언행이 근접하기를 희망하면서.   

 

인간다운 고백으로 질문자에 말에 대답합니다. "나는 내가 쓰는 에세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. 신변잡기의 글은 부끄러운 나의 지난 삶을 썼습니다. 반면 세상을 해석하는 글은 때로 아름답게 해석하여 씁니다. 그렇게 살고 싶은 희원때문입니다. 그렇게 살고 싶지만 살 수 없는 바람이라고 할까요. 그렇습니다. 그런 면에서는 나는 위선자입니다. 다만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순간은 그 마음입니다. 글을 쓰는 순간,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순간은 내 마음도 아름다워지듯이, 아름다운 글을 쓰는 순간은 내 마음도 그렇습니다. 그래서 그런 글을 씁니다." 솔직한 대답, 그나마 그런 대답이 나를 조금 위로합니다. 위선을 조금 벗을 수 있는 순간이니까요.

 

사람이 산에 들면, 산에 있는 순간은 선합니다. 산에서 내려오면 다시 마찬가지입니다. 기도원에서 마주친 그 분도 기도 시간엔 온전한 신의 딸로 선한 마음으로 가득찼을 겁니다. 마음과 몸의 일치는 이렇게 어렵습니다. 그게 인간입니다. 그렇다고 인간이란 구실을 붙여 나의 언행의 불일치가, 글과 삶의 불일치가 당연시되는 건 아닙니다.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닙니다. 때문에 나는 누군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. 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가 주어지면, 그 자리엔 가지 않습니다. 그냥 나는 내가 한 것은 한 것으로, 내가 지어낸 것은 지어내는 것으로 글을 씁니다. 내가 지어낸 아름다운 말처럼 살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.....내 글과 나는 달라요. 나는 글을 쓰는 만큼, 글을 쓸수록 위선자예요. 그러니 용서는 말아요. 이해도 말고요. 그럼에도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면, 나를 인정한다면, 그냥 고맙지요.

-최복현-

 

   


출처 : 책을 사랑하는 기술
글쓴이 : 어린왕자 원글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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